점프, 성공인가 실패인가 film2.0 2001/02/23

점프, 성공인가 실패인가
 
 
 
<번지점프를 하다>를 바라보는 두 가지 시선
 
2001.02.23 / 김영진 편집위원, 이효인(영화평론가) 
 
 
<번지점프를 하다>는 멜로드라마의 새로운 지평을 꾀했다는 일부의 호평에도 불구하고 극장흥행에서 크게 성공하지는 못했다. 이 영화가 최근 몇 년간 쏟아져 나온 한국 멜로드라마의 흐름에서 주목할만한 진전을 이뤄낸 것인지, 아니면 그저 그런 멜로드라마의 변형에 불과한 것인지 별다른 토론도 이뤄지지 않았다. 영원한 사랑이라는 주제에 과감하게 동성간의 사랑이라는 소재를 끼어넣은 이 영화는 파격일까, 아니면 또 다른 소재주의일까. 필름 2.0은 그 진위를 두고 두 평론가의 글을 싣는다.


꽤 멀리 뛴 멜로드라마의 번지점프

김영진 편집위원

멜로드라마는 실연하고 싶은 욕구를 부추긴다. 현실에서 겪는 실연이 끔찍하지만 스크린에서는 실연의 간접 경험을 통한 눈물쏟기 스트레스 해소법을 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멜로드라마는 근본적으로 퇴행의 장르이다. 대체로 남녀 주인공이 사랑을 가로막는 장애를 극복하지 못하는 이야기를 통해 사랑의 상실감을 그려내고 또 그런 만큼 상실이 없는 영원한 사랑에의 그리움을 담기 때문이다. 그게 꼭 사랑의 심리적 감정만큼이나 사회를, 현실을 가리키지 말라는 법은 없다. 60년대식 <미워도 다시 한번>류의 멜로드라마는 봉건적 인습에 갇힌 여성의 이야기를 통해 사회적 구속의 한계를 비추는 못난 거울 역할을 했다. 또 70년대식 <영자의 전성시대>류의 멜로드라마는 더 직접적으로 개인의 사랑과 행복을 방해하는 사회의 계급 차별을 가리켰다.

그러나 1990년대 중반 이후의 한국 멜로드라마 영화는 이상하게도 가족, 일상, 사회, 현실을 스크린에서 지우기 시작했다. 이를테면 <편지>의 남녀 주인공 환유와 정인은 가정이 없는 고아였다. '가족’의 배경이 없는 상태에서 만난 두 사람은 양가 부모라는 틀에 들어가는 번거로운 절차 없이 곧바로 행복한 가정을 꾸릴 수 있다. 서정시의 한 대목을 떠올리게 하는 수목원 풍경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이 영화의 이야기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진 일상을 되짚어보면 놀라울 정도다. 모든 게 광고에서 선전하는 행복한 삶의 이미지에 맞게 잘 포장됐다. 그 행복의 절정에서 불치병으로 인한 죽음이라는 멜로드라마의 수사학이 펼쳐지는 것이다. 조금씩 편차가 있지만 과거의 공간, 돌이킬 수 없는 공간의 기억을 압핀으로 고정하고 싶은 향수의 감정을 끌어들인 허진호의 <8월의 크리스마스>를 빼면 대체로 90년대 중반 이후의 멜로드라마는 현실의 공간에서 더 멀어졌다. 그건 <접속>에서 묘사된 통신 공간이나 <동감> <시월애> 등 시공을 초월한 러브스토리 판타지로 옮겨갔다.

이 모든 한국 멜로드라마 영화에 담긴 공간은 어쩌면 유령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그곳은 살고 싶은 충동을 불러일으키지만 결코 실재하지 않는 공간이다. 영원한 사랑을 주장하지만 사실은 사랑이 부재하는 것을 감추고 가상의 판타지로 치장한 스크린의 공간에서 관객은 사랑하고 싶은 욕망을 영원히 유예하는 기다림의 충동을 달래는 것이다. 한국 멜로드라마 영화의 다른 한편에는 사랑이 섹스하기 위한 핑계일 뿐이라는 홍상수식 냉소가 있었고 어두운 여관방을 전전하며 가학과 피학의 놀이를 되풀이하는 장선우의 <거짓말>이 있었다. 사실은 우리 중 누구도 사랑을 믿고 있지 않은 것이 아닐까. 그렇기 때문에 사랑하고 싶은 마음으로 기다리고, 사랑을 냉소하고, 사랑하는 사람이 죽었는데도 그 사랑하는 사람이 살아 돌아온다고 믿으면서 기다리는 것이 아닐까. 그 달콤한 거짓말이 이 시대 멜로드라마의 시대정신이 아닐까. 현실을 부정하면서 달콤한 거짓말에 끊임없이 몸과 마음을 의탁하고 싶은 욕망 말이다.

그런 맥락에서 <번지점프를 하다>는 이상한 멜로드라마다. 영원한 사랑, 영겁윤회의 모티브에 새로운 걸 덧붙였다. 동성애의 심리학이 끼어든 것이다. 목숨을 걸고 사랑했던 여인이 남자로 환생했다. 게다가 그는 선생인 남자 주인공의 제자이다. 매일 수업시간에 그를 쳐다보며, 그의 몸짓과 말투와 습관에 묻어 있는 애인의 자취를 느끼며, 주인공은 전율하기 시작한다. 평론가 김성욱의 말을 빌리면 이 기이한 '시선의 스펙터클'은 멜로드라마의 수사학에 어떤 균열을 내고 있을까. 남자 선생과 남자 제자가 떨리는 대사를 주고받으며 멜로드라마의 감동을 자아내는 이걸 뭐라 부를까.

남녀 주인공의 어긋나는 마음의 흐름을 담는 멜로드라마에서 그러니까 주인공의 심리적 흐름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사랑하는 데는 구실이 붙고 거기에 딸린 삶의 흔적이 붙으며 그게 멜로드라마를 우리가 이야기하는 비평적 구실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멜로드라마의 수사학에선 시점과 타이밍이 중요하다. 관객의 지식, 시점이 서로 다른 등장인물의 지식, 그것들이 불협화음을 내면서 멜로드라마의 효과를 얻는다. <번지점프를 하다>는 닭과 알의 관계처럼 묘하게 영원한 사랑이라는 전제와 동성간의 사랑이라는 모티브를 헷갈리게 끌고간다. 우선 우리는 남녀 주인공인 인우와 태희가 대학 시절에 만나 서로 운명적이라 믿는 사랑을 나누는 모습을 본다. 그 사랑이 태희의 죽음이라는 돌발적인 불행으로 중단됐을 때부터 드라마는 우리에게 제한된 정보를 준다. 어떤 이유로 태희가 죽었는지 설명되지 않은 채 시간은 1980년대 초에서 2000년으로 건너뛰며 인우는 남자 고등학교의 국어선생으로 부임한다.

초반부의 전형적인 로맨스 영화 분위기는 중반 이후부터 추리 영화 구조를 끌어들이기 시작한다. 인우는 담임을 맡은 학급의 현빈이라는 학생에게 강박적으로 집착하기 시작하는데 그가 왜 그러는지 처음에는 도통 알 수가 없다. <번지점프를 하다>가 감행한 모험은 바로 이것, 현빈이 환생한 태희의 모습이라는 걸 관객에게 알려줄 때까지 멜로드라마의 성차와 기존 도덕을 은근히 거스르면서 발생시키는 시선의 쾌락 때문이다. 처음에 우리는 인우가 현빈의 모습을 갈망하듯이 바라볼 때 그 시선에 동일화되지 못한다. 영화는 고집스럽게 환생한 연인/남자/학생인 현빈에게 가까이 다가서고 싶지만 그러지 못하는 인우의 상실감과 동경을 따라가며 조금씩 이야기의 정보를 제공하고 그것이 사실은 멜로드라마 수사학의 일부라는 걸 납득시키려 애쓴다.
<번지점프를 하다>의 멜로드라마적 감동은 그러니까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다. 관객은 인우보다 훨씬 뒤늦게, 현빈보다 조금 더 빨리, 현빈이 환생한 태희라는 걸 깨닫고 그때부터 인우의 감정을 초반의 멜로드라마 틀 안에서 받아들이기 시작한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 그것은 멜로드라마의 감성으로 포섭되지는 않는다. 전생과 현세를 오가며 되풀이되는 사랑이라는 걸 결론에서 받아들이더라도 영화를 보던 그때, 인우가 같은 남자인 현빈의 목덜미를 떨리는 손길로 만지고 싶어했던 감정에서 느꼈던 당혹감, 그것의 본질은 바뀌지 않는다. 영원한 사랑이라는 이 시대의 달콤한 거짓말이자 신화이자 또는 어떤 사람에게는 현실보다 더 믿고 싶은 전제를 끌어들이면서 <번지점프를 하다>는 친숙한 멜로드라마에 낯선 동성애 감정을 깔아놓고 있는 것이다. 비록 사랑했던 여인이라는 단서가 붙긴 하지만 이것은 남녀간의 사랑이라는 고정된 틀에 동성간의 사랑이라는 부분적인 파격을 끼워넣는 모험을 시도하고 있다. 어떤 멜로드라마에서도 사랑하는 여인을 만지는 것과 같은 심정으로 남자를 더듬는 묘사는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건 부분적이나마 이 영화가 도덕과 통념의 경계를 일시적으로 살짝 무너뜨리면서 평론가 이상용의 말대로 "고전멜로와 추리드라마의 장르 이종교배를 통해 이성애와 동성애, 도덕과 비도덕을 교배하는 결과를 얻어낸 것"이 아닐까.

물론 <번지점프를 하다>는 멜로드라마의 과장된 수사법을 통해 영원한 사랑에의 희구라는 안전한 지점으로 착지하고 있다. 83년에 계곡에서 번지점프했던 여자 태희가 한 번의 점프, 몸을 튕겨올리면서 2000년에 번지점프하는 현빈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처럼. 영화 말미의 그 풍경은 익숙한 사랑의 신화를 재탕하면서 그 구석 한편에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얼마나 멀리까지 나아갈 수 있는 것인지를 완곡하게 암시하는 산뜻한 결말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것은 본질적으로 주류의 감성은 아니며 아웃사이더의 것이다. 그런 감정의 영역에 관객이 심정적으로 동조하기 어렵다는 것은 비교적 잘 짜인 이야기에도 불구하고 크게 흥행하지 못한 이 영화의 극장 성적이 말해주고 있다. 아무리 영원한 사랑의 감정이라고 영화가 말해주어도 우리는 인우가 현빈의 몸을 눈으로 더듬을 때 그게 사랑하는 연인간의 시선 교환이라기 보다는 동성간의 불편한 연애감정이라고 받아들인다. <번지점프를 하다>는 멀리 나아간 영화는 아니지만 아주 흥미롭게 멜로드라마의 수사학과 기존 도덕의 통념의 문턱을 살짝 넘을 뻔한 자취를 감추고 있는 영화이다. 상대적으로 퇴행적인 다른 한국 멜로드라마의 착상에 비할 때 이건 평가할만한 모험이다. 편안한 상황에서 시작해 불편한 상황으로 전개됐다가 마지막에 편안한 카타르시스를 주는 멜로드라마의 수사학에서 꽤 신선한 일탈을 감행한 영화인 것이다. 내가 오히려 불편했던 것은 영화 중반의 동성애 감정이 아니라 너무 안전한 마지막의 결말이었다. 굳이 위험을 무릅쓰고 번지점프의 스릴을 즐기는 것처럼 때로 너무 안전한 것은 재미가 없는 법이다.
 

 
세기말적 애정영화의 모사품

이효인(영화평론가)

질병 특히 죽음에 이르는 질병이란 시대에 따라 다르게 인식되어 왔다. <편지>(이정국, 1997)와 <8월의 크리스마스>(허진호, 1998)에서 나오는 남자 주인공들의 질병은 사랑을 위한 설정이자 그들 사랑의 영원함 혹은 그의 순수함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기쁜 우리 젊은 날>(배창호, 1987)에 나오는 여주인공의 죽음은 그녀의 세속적 욕망이 지핀 방황의 대가인 동시에 영원한 사랑의 상징이었다. <별들의 고향>(이장호, 1974)에서 여주인공의 죽음은 그녀를 괴롭힌 뭇 남성과 시대에 대한 저항을 은연중에 나타내는 동시에 그녀의 죽는 모습을 통하여 가학적 연민을 불러일으키는 이중적인 것이었다. <오발탄>(유현목, 1961)에서 주인공의 아내를 죽게 한 임신중독증은 가난, 즉 사회적 질병에 기인했다. 문학에서도 그것은 예외가 아니다. 시인 고은의 초기 시에 나타난 '폐병 걸린 누이'의 이미지는 순수와 감염되고 싶을 정도의 안타까움이 겹겹이 둘러쳐진 것이라면, 우리 소설에 심심찮게 나오는 '폐병 걸린 인텔리 청년'의 모습은 이성적 삶의 전제 조건처럼 보이는 것이었다. '폐병 걸린 누이'가 영원성을 향한 퇴행이었다면, 폐병 걸린 인텔리 청년은 영원성을 추구하지만 그것을 가로막는 현실을 냉소적으로 조망하는 시선이었다. 하지만 그 시선은 대체로 '정신적 장식'이거나 '관념적 장식'인 경우 또한 많았다(이런 맥락에서 보자면, 요절한 시인 이상과 윤동주 그리고 요절한 조각가 오윤 등의 이미지는 적어도 향후 몇십 년 동안은 우리 사회의 정신적 장식으로 작용할 것이다).

그런데 이 글에서 언급한 질병에 관한 문학과 영화의 설정을 비교하면 서로 다른 점을 느낄 수 있다. 영화의 그러한 설정은 대체로 정신적 장식과는 관련이 없다. 정신적인 작용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멜로드라마 공식의 '위기' 단락의 역할을 뒷받침하는 것이다. 반면 문학의 그러한 설정은, 그것이 정신적 장식이나 관념적 장식에 머문다고 하더라도, 정신적 순수성을 추구하는 그 자체이거나 질병에 걸린 인물이 세상과 마주하거나 바라보는 방식을 통하여 비판적 혹은 냉소적인 현실 환기력을 불러일으키는 정신적 작용의 상징으로 쓰였다. 즉 '폐병 걸린 인텔리 청년 혹은 요절한 천재'와 '불치병에 걸린 보랏빛 소녀와 옥빛 소년의 사랑'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존재하는 것이다.

1980년대 대중 작가 최인호의 영향 아래 만들어진 <기쁜 우리 젊은 날>(배창호, 이명세 극본)과 <겨울 나그네>(최인호 극본) 등이 지향했던 사회적 맥락이 '가공된' 장렬하고 순수한 사랑 따위는 90년대부터는 무척 낡은 것이 되고 말았다. 나는 최근 한국 영화에서, 그야말로 면면히 이어져오는 '주인공 죽이기' 현상을 세기말적 징후의 일종이라고 보는 편인데, 더 정확한 표현은 아마 세기말적 징후를 '모사품으로 만들기'가 될 것이다. 90년대 이전의 '주인공 죽이기'와 이후의 그것은 질적으로 다른 궤적에 놓여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의 우열을 가리는 일은 불필요할 뿐만 아니라 아둔한 일이며, 대신 이런 전통(?)의 배면에 놓여 있는 것을 밝히는 것이 더 필요할 것이다. 90년대 멜로드라마의 '주인공 죽이기' 뒤에는 <사랑과 영혼>이 있다. 죽어서까지 애인 곁을 떠돌며 사랑한다? 얼마나 위무적인가! 순수한 사랑을 믿어서가 아니라 꿈에서라도 달성하고 싶은 진정한 사랑에 대한 갈망이 이 속에는 묻어 있다. 하지만 그 갈망을 드러내는 방법은 전혀 진정하지도 않고, 결코 갈망하는 태도도 아니었다. 멜로드라마의 컨벤션을 준수할 뿐이었다. 세기말적 징후? 사랑이 파탄났다고 생각한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그러나 모두 다 같이 사랑이 파탄났다고 공감했다는 점에서 그것은 세기말적 징후다. 이 세기말적 징후를 묘사하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다. 사랑은 치사한 것이라고 말하거나 현실에 의해 파괴되는 사랑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이 하나이고, 다른 하나는 '그래도 사랑은 있다'라고 설득력 있게 말하는 것이다.

질병으로 인한 요절이든 사고로 죽든 '주인공 죽이기'는 매한가지다. 울고불고 또 우는 <편지>, 어처구니없이 주인공을 죽였다 살렸다 하는 <시월애>처럼 <번지점프를 하다> 역시 주인공을 죽이지 않고는 성립되지 않는 영화였다. 이 영화 특히 시나리오에 대한 평가는 같은 궤적에 놓을 수 있는 다른 영화들에 비해 덜 황당하고 논리적 일관성이 있으며, 세심한 디테일 예컨대 숟가락과 젓가락 얘기 등이 중심 플롯과 맞아 떨어져서 정신적 포만감을 줬다는 평가를 크게 뛰어넘는 것은 아니다. 여기에 여느 멜로 드라마와 마찬가지로 일상이라는 장치를 비교적 적절하게 배치했으며, 하위 플롯이 제시되는 시기의 적절함, 중심 플롯과 하위 플롯의 균형과 조화가 대체로 긍정적 평가를 끌어낸 것이었다.

하지만 이 영화가 빠뜨린 것은 그들의 지속적인 사랑을 가능케 한 동기 부분이다. 사랑에 무슨 이유가 있겠냐마는 그건 현실 차원의 논리일 뿐이다. 영화 차원에서는 왜, 어떻게 사랑했길래 바로 눈앞에서 다른 모습으로 환생했는가에 대한 정보를 주어야 한다. 따라서 이 영화는 상대적으로 완성도 있는 내러티브를 갖추었을 뿐이다. 게다가 이 내러티브를 드러내는 스타일은 무미건조함 외에는 달리 표현할 길이 없다. 그래서 이 내러티브가 최종적으로 도착한 지점, 즉 주제는 너무 말랑말랑하여 이빨에 끼어버린 껌 같은 것이 되고 말았다. 여기서 사고사는 '불치병에 걸린 보라빛 소녀와 옥빛 소년의 사랑'만큼 보기에 민망한 것이었다. 힘겹게 오려낸 주인공들의 일상 또한 비판적 혹은 냉소적인 현실 환기력을 불러일으키는, 그럼으로써 사랑의 불가피성이나 운명성에 설득력을 부여하는 것은 아니었다. 버스 정류장에서의 기다림, 낡은 여관에서의 망설임, 캠퍼스와 강의실에서 일어난 에피소드 등 이젠 한국 멜로드라마의 컨벤션처럼 되어버린 일상적 묘사의 반복에 불과한 것이다. 물론 이 영화는 이 시대의 징후로 읽힐 수 있다. 만든 이들은 결코 의도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동성애적 관계처럼 보인 부분 역시 이 시대의 징후로 읽힐 수 있다. 그것은 동성애에 대한 찬반 여부를 떠나서 이 시대의 강박성을 드러내는 부분이다. 하지만 징후 읽기가 가능하다는 것이 작품의 가치와 직결되는 것은 아니다. 만약 직결된다면 그것은 최근 어떤 징후를 읽을 수 있는 1960년대 전후의 한국영화가 마치 숨겨진 작품인 것처럼 오인되는 것과 같은 맥락일 뿐이다.

아주 특별한 경우를 제외한 거의 모든 작품은 유사한 작품들과 함께 비교될 수밖에 없다. 우리가 독창성이나 변별성이라는 단어를 쓰는 것은 '맥락'을 염두에 뒀기 때문이다. <번지점프를 하다>는 1990년대 후반 이후에 나타난 한국 멜로드라마의 맥락에 놓인다. 그랬을 때 이 작품은 상대적인 비교 차원에서 이야기 꼴을 제대로 갖춘 것에 불과하다. 장르영화의 공식을 준수하는 것은 불가피한 것이었다고 하더라도, 이젠 지루해진 일상 묘사를 답습한 것은 신선함을 스스로 포기한 것처럼 보인다. <세상 밖으로>에서 '욕'이 등장한 이후로 이젠 욕 나오는 영화가 지겨워진 것처럼. 그래서 이 영화는 세기말적 애정관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을 뿐 아니라 그와 연관된 모사품을 만들었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듯하다. 이런 영화를 만든 이들은 자주 이렇게 말한다. '누구나 겪을 법한 일이고 다양하게 느낄 수 있는 단순한 사랑이야기'라고 말이다. <번지 점프를 하다>의 감독마저 이런 말을 한다면, 그는 너무 순진하다 못해 위선적이라는 말을 들을 것이다. 게다가 자신이 한 작업의 이유와 전략이 없다는 점에서는 사려 깊지 못한 태도라고 볼 수밖에 없다. 이 영화의 '주인공 죽이기'는 할리우드산이며 안전한 투자의 다른 표현인 동시에 정신적 작용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으로써 <번지점프를 하다>는 질병 혹은 운명적 죽음이 가진 암울한 사랑을 억지로 희망차게 마무리지었을 뿐 아무런 울림도 만들어내지 못했다. 그리고 '잘 만든 영화'의 문턱에 걸려 넘어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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