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재봉의영화산책]"번지점프를하다" - 세계일보 , 2001/02/01

세계일보 2001-02-01
[하재봉의영화산책]'번지점프를 하다'
 
상업영화의 대중 추구주의를 가장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장르가 멜로 드라마다. 멜로 드라마의 주인공들은 수많은 갈등을 겪지만 결국 전통적 가치에 투항하며 사회적 관습에 지배당한다. 가치전복적인 내러티브는 소수의 지지만을 받기 때문이다. 그러나 TV가 대량 보급되면서 멜로드라마를 선호하는 대중들은 대부분 안방극장으로 몰려 갔다. 영화제작자들은 이제 상투적 연애담에 새로운 외투를 입혀야 할 때가 온 것이다.
올 겨울 극장가에 선보인 멜로 영화들은 대부분 비슷한 소재와 반복적인 내러티브로 일관했다. 일상적 리얼리티를 극대화하거나(나도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다) 낭만적 사랑을 재현하고(불후의 명작), 시한부 인생의 비극적 소재를 반복하는(하루, 선물) 데 그쳐 관객들의 뜨거운 지지를 얻는 데도 실패했다. 한국 멜로영화의 수준을 격상시킨 '8월의 크리스마스' 이후 새로운 내러티브로 무장된 멜로영화는 아직 출현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고은님 각본의 '번지점프를 하다'는 관습적 내러티브를 해체하면서 인연 모티프라는 동양의 전통적 소재를, 동성애라는 새로운 코드에 접목함으로써 전혀 새로운 이야기 구조를 보여준다. 영화는 크게 1983년의 대학시절과, 그 17년 뒤 남자 주인공 이병헌이 고등학교 교사로 일하고 있는 2000년의 시간적 배경을 갖고 전개된다. 아쉬운 것은 대학시절을 무대로 한 전반부의 사랑 이야기가 더욱 더 간절하고 소중하게 표현돼야만 했다는 점이다. 그래야만 후반부의 질긴 인연의 실타래가 당위성을 갖게 된다. 또 고등학교 교실을 무대로 하는 화면들은 지나치게 산만하다. 관객들이 두 사람의 가슴아픈 사랑 이야기에 집중할 수 있도록 카메라는 조금 더 인물에 밀착돼야만 했다. 치명적 약점은 라스트 신이다. 17년을 이어지며 가슴을 치는 사랑 이야기가 관객들의 가슴을 울릴 수 있으려면, 관객들이 번지점프대에 올라가 있는 이병헌 옆에서 그의 옛 사랑인 이은주의 모습을 볼 수 있어야 했다. 만약 그랬다면 긴 여운이 자리잡았을 것이다. 지나치게 진실을 감추고 동성애적 미스터리로 관객들의 호기심을 자아내려는 노력이 무리수를 범한 것이다. 또 이병헌의 제자 현빈 역의 여현수는 공개 오디션을 통해 선발된 신인인데, 그의 외모는 이 영화에서 굉장히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다. 연기와는 무관하게 여현수는 작품이 원하는 이미지와 맞지 않는다. 이것도 '번지점프를 하다'의 완성도를 방해하는 장애물로 작용하고 있다. 뛰어난 완성도를 갖고 있는 각본에도 불구하고 관객들이 극장에서 볼 수 있는 화면은 많은 아쉬움을 갖게 한다. 하지만 사소한 흠도 각본의 힘으로 극복될 만큼 관객들은 이야기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역시 영화의 출발은 좋은 시나리오다. /영화평론가

기사입력 시간 : 02/01 1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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