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밥 먹고 잠자고 화장실 가면 안 되나? - 2001.02.10 film2.0

그냥 밥 먹고 잠자고 화장실 가면 안 되나?
 
겨울 한국영화, 멜로드라마의 일상
2001.02.10 / 이지훈 기자  film2.0

 
올 겨울 개봉했던 한국 멜로영화들에서 일상은 그 자체의 재발견으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소재주의로 활용되는 수준에서 그친다. 일상의 부활은 단순한 소재의 확산 그 이상이다.

올 겨울의 한국영화에는 유난히 사랑 이야기가 많았다. 멜로드라마의 집중 포화. 12월 2일 개봉한 <순애보>에서 2월 3일 개봉한 <번지점프를 하다>에 이르기까지 펼쳐진 한국형 사랑 이야기의 향연. 비슷한 시기에 연달아 개봉한 이 영화들은 무엇을 말해주고 있을까. 이 영화들을 묶어주고 만나게 하는 곳은 어디일까. 그것은 '일상'이다. 그것은 올 겨울 한국 멜로드라마의 지형도를 정리하는 열쇠말이다. 부쩍 일상적인 감정의 고저장단을 강조하는 한국영화가 늘어난 것이다. 이제 영화의 한 자락씩 재미있게 풀어보자.

남자와 여자가 대화를 나누고 있다. 남자는 거실에서 뭔가를 하고 있고 여자는 화장실에 있다. 평범한 장면이다. 잠시 후 카메라는 느닷없이 화장실 안으로 침투한다. 이런, 여자는 변기에 앉아 일을 보고 있다. 가뜩이나 더러운 화장실에서 여자의 지저분한 행동은 한동안 생중계된다. 충격적이다. <사랑을 위한 죽음>(1973)에서 폴 버호벤 감독은 한순간 기존 영화들이 소외시켰던 금단의 구역을 시치미 뚝 떼고 화폭에 담는다.

화장실은 가장 일상적인 공간이다. 일상생활에서 인간은 자주 화장실을 들락거린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영화 속의 주인공들은 거의 화장실에 가지 않는다. 왜일까? 왜 화장실은 영화에서 배제돼 왔던 걸까? 이유는 분명하다. 대다수 영화가 보여주는 일관된 드라마의 흐름에서 등장인물이 화장실에서 볼일을 보는 장면은 불필요하니까. 부엌이나 사무실 등의 일상공간도 마찬가지다. 콩나물을 다듬거나 볼펜심을 갈아 끼우는 ‘일상적 행위’를 영화에서 만나기가 어디 쉬운가?

매일매일 똑같이 반복되는 일상. 일상에선 아무런 극적인 사건도 벌어지지 않고 내일은 오늘과 똑같다. 지겹다. 따분하다. 누구나 일상은 있지만 누구도 일상을 달가워하지는 않는다. 주류 영화의 역사는 장르영화의 역사이며 액션, 멜로, 전쟁, SF 등의 장르영화는 관객에게 ‘비일상적인’ 경험을 주기 위해 만들어진다. 대체 누가 굳이 돈 내고 극장에 가서 방금 전에 나선 집에서 매일 경험하는 일을 다시 보고 싶어하겠는가?

일상의 반대 지점에 위치하는 것은 극적인 상황의 연속, 스펙터클, 드라마를 구축하는 인과적 압축과 비약 같은 것들이다. 형식적으로 장르영화는 생활언어를 배제하고 대사의 논리와 압축을 추구하며, 보편적인 세계를 탈생활화하기 위해 기교와 스타일을 첨가한다. 주인공은 못생기고 무능한 자연인이 아니라 스타라는 슈퍼맨이다. 하지만 장르조차 반복의 지루함에 빠져들자 영화는 마치 일상이 미처 발견하지 못한 신세계인 것처럼 달려들기 시작했다. 일상을 다룬 영화는 다시 그 정반대의 형태로 나타났던 것이다.

가까워질수록 멀어진다

박흥식 감독의 <나도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일상 영화’의 잣대를 들이대기에 좋은 영화다. 일상 영화를 몇 가지로 분류해보자. 첫번째는 드라마의 정형에서 소외된 일상의 단면들을 부상시키는 영화들이며 <나도 아내가...>가 그렇다. 장르에서 일상으로 귀환하는 듯한 영화들은 대부분 여기에 속한다. 일상에서 새로운 재미를 끄집어내고, 일상이라는 것이 그렇게 지겹지만은 않다고 힘주어 말한다. 대표적인 감독이 이명세다. <나의 사랑 나의 신부>나 <첫사랑>, 심지어 잠복하고 있는 차 안에서 설렁탕을 떠올리는 <인정사정 볼 것 없다>의 무식한 형사들조차도 일상에서 행복을 찾는다. <나도 아내가...>는 그 대를 잇는다. 대부분의 장면에서 봉수와 원주는 무료한 일상을 되풀이하지만 감독은 그것만으로도 한 편의 영화가 관객에게 재미를 줄 수 있다고 자신만만이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이 영화는 일상을 있는 그대로 쓰다듬지 않는다. 여전히 <나도 아내가...>는 장르의 틀 안에 있다. <미술관 옆 동물원>이 TV를 보거나 식사준비를 하는 일상행위의 연속을 머리 좋게 사랑의 과정에 포함시켰듯이, <나도 아내가...>에서 형광등을 갈아 끼우거나 텅 빈 아파트에 홀로 앉아 노래를 부르는 일상은 봉수와 원주의 결핍을 창조해 결국은 둘의 만남과 사랑에 근거를 부여하는 수단이다. ‘일상을 비집는 틈’에서 유머를 발생시키는 것을 포함해 일상이 아닌 다른 목적을 향해 우회로를 걷고 있는 것이다. <나도 아내가...>의 본질은 일상을 판타지로 채색하는 것이며 역설이지만 그 때문에 일상에서 멀어진다.

심광진 감독의 <불후의 명작>도 마찬가지다. 인기와 여경은 모두 바나나 우유를 좋아하고 반복되는 생활에서 비슷한 무기력을 겪으며 일상의 결을 따라 지낸다. 함께 들어선 여관방에 맥주병이 놓여 있는 장면은 이명세적 일상 소품주의의 전형을 따르는 것이다. 그러나 정작 하고 싶은 이야기는 그런 일상을 넘어 꿈을 꾸는 인간의 모습이다. 인기와 여경의 일상은 오히려 그것이 부정되는 지점에서 존재의 이유를 찾고, 일상이 사라질수록 ‘불후의 인생’을 꿈꾸는 감독의 정서는 빛이 난다. 왜 이렇게들 일상을 못살게 구는 걸까?

일상의 탈을 쓰긴 했지만

한지승 감독의 <하루>는 훨씬 더 노골적인 방식으로 일상을 ‘사용’하기에 이른다. <나도 아내가...>와는 다른 두번째 유형이라 할 이 영화는 드라마를 제조하기 위해 일상을 극적으로 포장한다. 이현승 감독의 <시월애>도 여기에 속한다. <시월애>에서 우리는 혼자 사는 남자의 고독이 휘황찬란한 파티로 돌변하는 이정재의 멋들어진 스파케티 신을 만날 수 있다. 그가 일상적으로 걸어가는 산책로의 끝에 다다르면 그럴듯한 카페와 마주친다. <하루>에서 한지승 감독은 가까스로 아이를 얻은 부부의 행복을 일상공간의 미화로 탈바꿈시킨다. 석윤과 진원 부부는 임신을 하자마자 우선 이사를 간다. 원래 있던 아파트에선 아이를 키울 수가 없나? 그들은 집 안 구석구석이 예쁘게 꾸며진 전원주택으로 공간을 옮긴다. 집은 가장 일상적인 공간이다. 한지승 감독은 <하루>가 지닌 멜로의 본령이라 할 진원의 모성을 일상의 이미지로 변형함으로써 일상을 철저하게 꿈의 공간으로 탈바꿈시키는 전략을 쓰고 있다. 거기서 진원은 태어날 아이의 방을 준비하고 음식을 만든다. 일상의 모든 행위는 모성을 중심으로 진행되는 멜로드라마의 조각으로 기능하며 일사분란하게 조직되고 있는 것이다.

일상을 어떻게 영상에 담을 것이냐는 문제는 영화의 객관성과 주관성을 떠올리게 한다. 일상을 있는 그대로 담아낸다는 것은 자생적으로 흘러가는 인생의 어느 한 부분을 잘라내 적어도 그 안에서는 최대한 객관적인 시선으로 일상을 관찰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하루>는 일상을 주관적으로 재가공해 다른 꼴로 변형시킨다. 감독의 소재주의적 선택과 변주에 고개를 숙이는 것이다. <하루>의 일상은 일상의 탈을 쓴 장르의 부품이다.

운명의 고리가 비집고 들어온다

마르크스는 대표적인 구조주의자다. 그는 자족적으로 흘러가는 듯 보이는 개인의 삶조차도 사회의 구조적 속성에 지배를 받는다고 했다. 만일 그가 살아 돌아와 이재용 감독의 <순애보>와 김대승 감독의 <번지점프를 한다>를 본다면 흥미롭게 관람할 것이다. 물론 이 영화들에 담긴 계급 관점이 그를 만족시키진 못하겠지만. 일상을 다루는 세번째 형태의 영화들은 무심코 펼쳐지는 일상의 밑바닥에 인간을 치밀한 관계로 엮어내는 구조가 있다고 말한다. 이런 유의 영화들은 일상에 신비로운 기운을 불어넣는다. <순애보>의 우인은 동사무소 업무로 소일하고 자주 화장실을 들락거리며 일상적인 행위를 반복한다. 하지만 이재용의 인공 미학은 어딘가 그의 일상이 운명적인 지점을 향해 치닫고 있음을 느끼게 한다. 그는 뭔가에 갇혀 있다. 과연 우인이 매일매일 겪게 되는 일상은 다른 공간에 놓인 아야의 건조한 일상과 운명적으로 조우한다. 그 운명이란 게 바로 거대한 구조인 것이다.

<번지점프를 하다>에서 태희는 인우에게 숟가락이라는 단어의 받침이 왜 ‘ㅅ’이 아니라 ‘ㄷ’이냐고 묻거나 연인에게 주려고 간직하던 라이터를 그에게 건네준다. 두 사람의 데이트 일상의 한 단면이어도 충분했을 숟가락과 라이터는, 그러나 결국은 환생한 태희를 인우가 알아보는 운명적 고리의 단서로 작용한다. <순애보>와 <번지점프를 하다>에서 일상은 그것이 운명이든 뭐든 간에, 인간의 삶을 지배하는 거대한 구조의 징후로 도약하는 것이다. <순애보>의 독보적인 스타일과 <번지점프를 하다>의 창의적인 내러티브가 묘한 기운을 발산하는 이유는, 그 바탕에 깔린 묘한 일상의 상징성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도 일상 그 자체는 아니다.

반복되는 일상을 거의 아무런 변형 없이 있는 그대로 사랑하는 영화란, 말처럼 그리 쉽지 않다. 연애의 일상에 굳이 이유를 달지 않는 배창호 감독의 <러브 스토리>나 목욕탕에서 평화롭게 라면을 끓여먹는 때밀이의 일상이 그냥 그것으로 끝나는 이하 감독의 단편영화 <용산탕> 정도가 있을 뿐이다. 이 영화들은 일상을 과하게 칭송하거나 괜스레 다른 데 사용하는 대신 존재하는 그대로의 가치를 찾으려 한다. 이것이 언제나 옳은 것은 아니다. 일상을 표현하는 방식에 어떤 ‘정치적 정당성’이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올 겨울 개봉했던 한국 멜로영화들에서 일상은 그 자체의 재발견으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소재주의로 활용되는 수준에서 그친다. 일상의 부활은 단순한 소재의 확산 그 이상이다. 결국은 인간이 어떻게 살아가느냐를 보여주는 데서 종착역을 찾게 될 영화에서 일상이란 전혀 다른 시선으로 바라보는 인간의 모습이다. 아직 거기까지는 나아가지 못했다. 한국영화에서 일상은 새롭게 떠오른 태도의 중간 즈음에 와있다. <순애보>와 <번지점프를 하다>는 특이하다. 하지만 여전히 장르 안에서 순환하고 다른 걸 보여주기 위한 핑계로 나오는 한계에 머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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